'보더랜드' 시리즈로 잘 알려진 기어박스는 올해로 창립 25주년을 맞이한 AAA급 게임업체다. 2021년 스웨덴의 엠브레서 그룹에 인수됐다가 2024년 3월 28일 테이크 투 인터렉티브에 4억 6천만 달러(약 6천4백억 원)에 매각됐다. 앞으로 신작 개발에도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까지 기어박스가 걸어온 역사를 정리해 보자.
■ FPS 진원지에서 탄생한 기어박스 소프트웨어
1999년 1월, 일렉트로닉 아츠는 2018년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미공개 FPS '프랙스 워(Prax War)' 제작을 취소했다. 약 2년 동안 텍사스주 댈러스 북쪽 교외의 플레이노(Playno)라는 도시에 기반을 둔 레블 보트 록커(Rebel Boat Rocker)에서 개발했으며, 렌더러를 제외하고 모두 자바로 프로그래밍된 흥미로운 프로젝트였다.
레블 보트 록커는 현재 기어박스 엔터테인먼트의 CEO인 랜디 피치포드(Randy Pitchford)를 비롯해 '듀크 뉴켐' 시리즈의 3D 렐름 출신과 모드 제작자들로 구성됐다. 참고로 레블 보트 록커라는 사명은 창립 멤버 중 한 명인 빌리 젤스낵(Billy Zelsnack)이 '언리얼'을 만든 에픽 메가게임즈(현 에픽 게임즈) 재직 당시 '너는 반역자(Rebel)로서 배를 흔드는 놈(Boat Rocker)'이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텍사스라고 하면 광활한 농지가 펼쳐진 큰 시골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중남부의 거점이자 NASA(미국항공우주국)의 본부가 휴스턴에 있다. 예로부터 테크놀로지 관련 인재들이 모여 테크놀로지 관련 대학도 많이 존재한다.
유명 게임사로는 '울티마' 시리즈의 오리진 시스템즈가 오스틴에 있고, 1990년대 '둠'과 '퀘이크' 대히트시키며 게임계의 록스타로 부상한 id 소프트웨어가 댈러스 근교에 자리 잡고 있다. 앞서 언급한 3D 렐름도 큰 성공을 거두면서 당시에는 게임 개발의 핫스팟이자 'FPS 진원지'라 불렸다.
레블 보트 록커는 프로젝트 취소로 인해 자금 조달이 힘들어졌다. 빌리 젤스낵 등 일부 개발진은 다른 게임사로 이직하거나 남은 멤버들도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에 이르렀다. 나머지 인원은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한 채 한 달 정도 사무실에서 'D2A('퀘이크 2 아레나'를 '둠'의 규칙으로 플레이하는 멀티플레이어 모드)'를 플레이하고 있었다.
그런 궁핍한 상태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워싱턴 주 시애틀 근교에서 '하프라이프'를 만든 밸브의 게이브 뉴엘이었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이렇게 해서 1999년 2월에 기어박스 소프트웨어가 설립됐다. 게이브 뉴웰의 의뢰로 '하프라이프'의 확장팩 제1탄 '하프라이프: 어포징 포스', 제2탄 '하프라이프: 블루 쉬프트'를 개발했다.
올해로 창립 25주년을 맞이한 기어박스 소프트웨어는 이제 '보더랜드' 시리즈로 유명한 AAA급 게임 제작사로서 2,000명이 넘는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탄한 출발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보더랜드 개발 비화
2000년 당시 기어박스 소프트웨어는 12명의 직원을 고용 중인 작은 개발사였다. '하프라이프' 확장팩 이후에도 '하프라이프'의 플레이스테이션 2 버전, '토니 호크스 프로 스케이터 3'의 Windows 버전, '헤일로: 컴뱃 이볼브드' Windows 버전 등 기존 작품을 다른 플랫폼으로 이식하는 제작사에 불과했다.
기어박스 소프트웨어의 첫 오리지널 작품은 유비소프트 엔터테인먼트에서 출시한 밀리터리 FPS '브라더스 인 암즈: 로드 투 힐 30'이다. 1998년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2001년에 방영해 호평받은 TV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전직 군인을 컨설턴트로 초빙해 제2차 세계대전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출시 9개월 만에 17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히트작이다.
게임 개발 경험을 축적한 기어박스 소프트웨어는 드디어 '보더랜드'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2015년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인기 장르인 FPS와 RPG의 핵심 루프(게임 플레이의 반복)는 완전히 다르다"며, "FPS는 단기간에 게임을 반복하지만, RPG는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워 플레이한다. 두 가지 게임 플레이를 하나의 게임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랜디 피치포드는 말했다.
이러한 목표는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의 성장에 그대로 적용됐다. 또한, 부품과 제조사 등 다양한 조합에 따라 1,600만 개 이상의 압도적인 총기 숫자도 자랑했다.
당초 '보더랜드'를 '헤일로와 디아블로의 하이브리드'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 발표된 것은 달랐다. 오히려 리얼리티 지향적인 그래픽으로 큰 화제가 되지 못했다. 게임이 75% 정도 완성된 시점에서 개발팀은 유저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비주얼을 만드는 것이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느꼈다.
레블 보트 누커 이후 랜디 피치포드의 오랜 친구이자 '시드 마이어의 문명' 개발에도 참여했던 베테랑 아티스트 브라이언 마텔(Brian Martel)은 당시 총괄 프로듀서였다. 그는 작은 팀을 꾸려 언리얼 엔진 3에 독자적인 셀 셰이딩을 추가했다.
다만 너무 독특한 분위기가 팀에 균열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한동안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독특한 아트 스타일이 랜디 피치포드 등을 사로잡아 셀 셰이딩을 채택하게 됐다. 원래 '보더랜드'의 세계관은 2006년 개봉한 단편 CG 애니메이션 영화 '코드헌터스(Codehunters)'에서 영감을 받았다. 게다가 외형도 비슷해 '코드헌터스'의 감독인 벤 히본(Ben Hibon)과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이 사실은 게임 출시 후 한참 후에야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더랜드'는 2009년 홀리데이 시즌에 깜짝 히트해 흥행에 성공한다. 퍼블리셔인 2K 게임즈에 따르면 연내 200만 장, 1년 동안 45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전년도에 출시된 '폴아웃 3' 등과 함께 정기적인 DLC를 미리 발표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기수가 됐다.
이후 '보더랜드 2', '보더랜드 프리시퀄', '보더랜드 3', 그리고 '타이니 티나의 원더랜드'까지 시리즈 작품의 총판매량(DLC 포함)은 7,600만 장에 달한다.
■ 엠브레서 그룹에서 테이크 투 인터렉티브로
기어박스 소프트웨어는 2013년 파산한 THQ 소유의 RTS 시리즈 '홈월드', '홈월드 2'의 IP를 136만 달러(약 18억 원)에 인수해 디지털 판매권을 획득했다. 당시 경쟁자는 오리지널 개발진이 캐나다 밴쿠버에 설립한 블랙버드 인터렉티브(Blackbird Interactive)였다.
기어박스 소프트웨어는 이들에게 IP 사용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시리즈 최신작의 개발 지원도 약속했다. 이와 함께 기어박스 퍼블리싱이라는 판매 부서를 설립하여 2016년 '홈월드: 데저트 오브 카락'을 출시했다.
기어박스 퍼블리싱은 초기에 너브 소프트웨어(Nerve Software)에 개발을 의뢰한 '듀크 뉴켐 3D: 20주년 기념 월드 투어', 피플 캔 플라이의 '블렛스톰: 풀 클립 에디션' 등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어 컴펄션 게임즈(Compulsion Games)의 '위 해피 퓨', 호푸 게임즈의 '리스크 오브 레인 2', 노어스펠 게임즈(Norsfell Games)의 '트라이브즈 오브 미드가드' 등 양질의 인디게임을 연이어 선보였다.
2015년 말, 기어박스 소프트웨어는 캐나다 퀘벡에 기어박스 스튜디오 퀘벡(Gearbox Studio Quebec)을 설립하는 등 다각적인 경영을 펼쳤다. 당시 500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중견 게임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래드 피치포드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더 큰 성장을 위해서는 자금이 더 필요했다.
2019년 5월 기어박스 엔터테인먼트를 출범하고, 기어박스 소프트웨어와 기어박스 퍼블리싱을 산하에 분사하는 형태로 효율성을 높였다. 2021년 4월에는 엠브레서 그룹에 13억 달러(약 1조 8천억 원)에 인수됐다. 액티비전 블리자드가 마이크로소프트 품에 안긴 것을 생각하면 중견 개발사의 생존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풍부한 자금을 확보한 기어박스 엔터테인먼트는 제3의 사업부인 기어박스 스튜디오를 설립해 TV 및 영화 콘텐츠 제작에 진출했다. 2022년 4월에는 중국의 퍼펙트 월드 엔터테인먼트가 북미에서 철수하는 것을 계기로 엠브레서 그룹이 사업을 이어받았다. 이와 함께 사명을 기어박스 퍼블리싱 샌프란시스코로 변경해 자산을 기어박스 소프트웨어 관할로 편입했다. 이로써 기어박스 엔터테인먼트는 2,200명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2023년 7월, 엠브레서 그룹의 자금 사정이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세인츠 로우', '페이데이 3' 등 많은 기대를 모은 작품이 흥행에 실패했고, 기어박스 엔터테인먼트도 '홈월드 3'의 발매를 몇 차례 연기한 바 있다.
'보더랜드' 시리즈의 판권은 2K 게임즈가 그대로 유지했지만, 엠브레서 그룹의 인수는 향후 성장을 염두에 둔 인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을 기약할 수 없는 엠브레서 그룹은 손해를 감수하고 구조조정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기어박스 엔터테인먼트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2024년 3월 28일, 2K 게임즈의 모회사인 테이크 투 인터렉티브가 기어박스 엔터테인먼트를 4억 6천만 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이전 인수 금액에 비해 1/3 수준으로, 테이크 투 인터렉티브는 '보더랜드' IP를 완전히 거머쥐었다. 여기에 '홈월드'와 '브라더스 인 암즈', 그리고 기어박스 엔터테인먼트가 보유한 '듀크 뉴켐', '리스크 오브 레인' IP도 확보했다.
한편, 기어박스 퍼블리싱 샌프란시스코 직속이었던 기어박스 상하이, 로스트 보이즈 인터렉티브, 크립틱 스튜디오는 그대로 엠브레서 그룹에 남았다. 이와 함께 '렘넌트' 시리즈와 '자이겐틱', '하이퍼 라이트', '브레이커' 등의 게임 판권도 그대로 엠브레서 그룹이 소유한 상태다.
물론 기어박스 퍼블리싱 샌프란시스코는 사명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어 퍼펙트 월드 엔터테인먼트 시절의 잔향이 느껴지는 아크 게임즈(Arc Games)로 변경됐다.
이번 인수를 발표한 2K 게임즈 측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우리는 '보더랜드' 시리즈의 기어박스와 친밀한 파트너십을 쌓았으며, 차기작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전하면서 시리즈의 유지를 약속했다. 지금까지 오랜 인연을 맺어온 양사의 호흡이 좋았기에, 기어박스 엔터테인먼트의 더 큰 성장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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