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슈헤이는 초대 플레이스테이션 출범부터 오랫동안 플랫폼의 발전에 이바지했고, 인디 게임 개발자의 발굴과 육성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해 온 인물이다.
요시다 슈헤이를 표현할 때 떠오르는 것은 '미소'다. 얼굴 전체에 환하게 웃는 그 미소는 누구라도 무방비 상태로 만들게 된다. 게다가 친근할 뿐만 아니라 열정이 넘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그의 초중고 시절 학업과 그에 얽힌 '놀이', 대학 재학 시절의 오락과 해외 인턴 생활,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에서의 도전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025년 1월, 소니인터랙티브엔터테인먼트(이하 SIE)에서 은퇴한 그는 이전보다 더 바쁘고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 스스로 게임을 만들던 어린 시절, 그리고 독학으로 좋은 성적을 거둔 학창 시절
요시다 슈헤이는 1964년 2월, 교토부 아야베시에서 3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생선과 채소 도매시장을 운영했으며, 이후 대형 슈퍼마켓이 등장하면서 사업이 축소됐다. 이후 일가가 함께 비즈니스호텔 경영을 하기도 했지만, 결코 부유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팥 시장에서 큰돈을 벌었지만, 그 후 빈털터리가 되어 빚더미에 앉게 됐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가장 역할을 할 때도 할아버지께서 시장 일을 도와주셨고, 돌아가시기 전에는 결국 빚을 다 갚으셨죠. 할아버지가 큰돈을 벌었을 때 요행을 바라고 모험을 했는데, 할머니는 '병적이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요시다 슈헤이는 초등학생 시절, ‘벽돌깨기’ 등의 아케이드 게임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1회에 100엔으로 당시 비싼 가격이었기 때문에, 종이와 연필을 이용해 직접 게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육각형 연필의 뒷면을 깎아서 1부터 6까지 숫자를 넣어 주사위로 만든 것을 2개 준비합니다. 종이에는 6×6의 사각형을 만들어요. 각 칸은 두 주사위의 눈의 조합에 해당하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적어둡니다.
예를 들어 야구 게임이라면 6과 6이 나오면 홈런을 치는 식입니다. 칸에 무엇을 쓰느냐에 따라 다른 게임이 되기 때문에 여러 개를 만들어서 친구들과 함께 놀았어요"
그 외에도 TBS의 음악 프로그램 '더 베스트 텐'의 순위 예측 등 다양한 게임을 주변에 제공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잠수함 게임'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게임이에요. 종이에 칸을 만들어 세로로 알파벳을 A부터 순서대로 작성하고, 가로로는 숫자를 1부터 적죠. 이렇게 좌표를 붙이고 맨 앞에서 출발해 두더지처럼 흙 속을 헤엄쳐서 가장 먼저 맨 앞에 도착하는 쪽이 승리하는 게임입니다.
1대1로 번갈아 가며 한 번에 한 걸음씩 나아가는 거죠.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상대 칸 어딘가에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직진뿐만 아니라 옆으로도 갈 수 있기 때문에, 5번째라고 해서 상대가 5번째 줄에 있다고는 할 수 없죠. 하지만 나중에 출발한 사람은 먼저 출발한 사람이 처음에 맨 앞줄 어딘가에 반드시 있기 때문에 10분의 1 확률로 갑자기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어요. 그렇게 서로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계산해서 서로를 노리는 그런 놀이를 하고 있었죠"
고등학생이 된 요시다 슈헤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감명을 받아 교토대학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거나,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질량이 무한대가 된다든지, 그런 것들이 재미있어서 상대성 이론을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교토대학이 근처에 있었고,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가 있는 등 물리학의 명문이었기 때문에 입학하고 싶다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어요"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한 그는 성적이 쑥쑥 올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국내 유수의 성적 우수자가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순다이예비학교에서 모의시험을 치러 전국 랭킹에 이름을 올렸어요. 공부하면 할수록 성적이 오르는 게 재미있어서 마치 게임처럼 느껴졌죠. 합격자들의 ‘나는 이렇게 공부했다’, '이런 요령이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 대학입시 공략서를 보며 연구해 나갔어요.
그래서 고3 때 순다이예비학교에서 모의시험을 3번 치렀는데, 각각 8위, 8위, 9위였어요. 순위 상위권에는 당연히 순다이예비학교에 다니는 수험생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중에 아야베 고등학교 출신인 제가 있던 거죠. '이 녀석은 누구냐'라며 꽤 유명해졌어요. 이웃 마을의 여학생이 만나러 오기도 했죠(웃음)"
그 정도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배출했으면 아야베 고등학교의 위상이 높아졌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를 미워하는 교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아야베 고등학교는 과목마다 80% 이상 출석하면 학점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학점을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 계산해서 오후에는 집에 가서 공부하기도 했어요. 수업에 나갈 때도 참고서를 가지고 가서 스스로 공부했죠. 그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선생님도 계셨고, '수업 안 듣고, 너 뭐 하는 거야!'라고 화를 내는 선생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선생님을 전혀 존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다 빼먹고 있었어요. 뭐, 결과도 내고 있었으니까요"
요시다 슈헤이는 원하던 교토대학에 당당히 합격했지만, 입학한 곳은 이학부가 아닌 경제학부였다.
"아버지가 시장을 물려주고 싶으니까 이학부에서 학자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누가 돈을 내줄 것 같으냐'라고 엄포를 놓으셨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경제학과에 들어갔어요. 사실 고3 때 순다이예비학교 모의시험도 1차는 이과로 봤지만, 2차 이후부터는 문과로 봤어요. 그래서 경제학과에 들어갔는데, 학업에는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았어요(웃음)"
학업에 흥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요시다 슈헤이는 대학에도 거의 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당시 교토대학은 이과생들은 모두 공부하는데 문과생들은 대학에 가지 않았어요. 수업 출석을 하지 않기 때문이죠. 수업을 선택하면 1년 내내 같은 수업을 듣습니다. 그래서 1년의 마지막에 한 번만 시험이 있고, 모든 과목에서 미리 선생님이 문제를 알려줍니다. 반에 10% 정도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그들이 시험 문제의 모범 답안을 만들어 주기도 하죠. 그걸 다 같이 공유해서 답안지에 복사해서 제출하면 합격선인 60점을 겨우 넘기게 됩니다.
그리고 답안지는 모든 시험에서 공통이었어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시험장에서 복사하는 게 귀찮아서 첫 번째 시험에서 답안지를 한 장 더 가져가서 두 번째 시험 것까지 미리 답안을 복사해 놓고 시험이 시작되면, 그것을 두고 나가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학 3학년까지 학점을 모두 취득했습니다"
대학에 가지 않고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냐면, 마작과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계속 마작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죠. 저보다 2살 위인 형이 있는데, 1년 재수해서 교토대학에 들어갔어요. 형이 계산을 잘못해서 학점을 하나 빼먹고 유급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형제가 모두 같은 해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마지막 해에 형의 방은 마치 장작더미 같았어요"
대학교 3학년이 된 요시다 슈헤이는 해외, 특히 미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 유네스코 교육기관을 통해 호주 회계법인에서 6개월간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호주에 가기 전에는 소위 말하는 수험 영어밖에 몰랐다고 한다.
"영어 성적은 꽤 좋았지만, 일반 참고서는 재미없어서 주로 음악이나 영화, 문고판 책으로 공부했어요. 특히 문고판은 내용에 흥미를 느끼면 괜찮을 것 같아서 '엠마누엘 부인'을 사서 열심히 읽었죠(웃음).
그다음이 라디오였어요. 재일미군을 대상으로 방송하던 FEN(Far East Network)을 듣고 있었어요. 지금은 인터넷에 그런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렇게 해서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공부했죠"
고등학교 시절, 교사의 무관심 속에서도 독학으로 공부를 진행하거나 대학 시절에 학점을 잘 따낸 그에게 호주는 좋은 환경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샐러리맨들은 워커홀릭이었죠. 그것이 경제의 발전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좋았지만, 호주에서는 자신의 시간을 더 소중히 여겼어요. 특히 제가 다니던 회계법인은 금요일 17시가 되면 술이 나와서 다 같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거든요. 일을 하고 있으면 "그만해!"라고 말하죠(웃음).
그래서 한참을 마시다가 어떤 사람은 집에 가고, 어떤 사람은 술집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도 하고요. 저는 말단이지만 감사팀에 배치되어 팀원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감사 대상 기업이 있는 골드코스트에 가서 해산물을 먹으러 가기도 하는 등 즐거웠어요"
■ 소니 입사, 그리고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를 만나 게임기 사업을 꿈꾸다
1986년 교토대학을 졸업한 요시다 슈헤이는 소니에 입사한다.
"당시 해외에 나가고 싶었고, 가업은 형이나 동생이 이어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했죠. 결국 세 형제 모두 도쿄로 나가게 되었지만요(웃음).
소니는 해외에서 일하기 좋은 회사라고 생각했어요. 당시에는 경제가 성장하고 있었고, 경제학부의 취업처로 무역회사나 은행이 인기가 많았는데, 저는 흥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소니에 간 선배가 너무 즐거워 보였죠. 당시 소니는 사업의 80% 이상이 해외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 일할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요시다 슈헤이는 소니가 나중에 게임기 사업을 시작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당시 소니는 MSX 규격의 PC를 다루고 있었어요. 컴퓨터를 다루고 있다면 향후 본격적으로 게임기를 만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저 자신도 게임을 좋아했기 때문에, 만약 게임을 만든다면 프로젝트에 참여시켜 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처음 배치된 곳은 경영전략본부였다.
"소니 본사 부서로, 사장님 직속 부서였어요. 대부분의 직원은 예산과 이익을 계산해 상부에 보고하는 경영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어요.
그 외에 소수의 인원이지만 새로운 사업 부문을 지원하는 팀이 있었는데, 저는 그 팀에 들어가게 되었죠. 새로운 사업부와 함께 리서치를 하거나, 새로운 사업이 될 것 같다고 판단되면 상부에 보고하기도 하고요. 참고로 같은 시기에 경영전략본부에 배치된 사람은 세가의 우츠미 사장(현 세가 대표이사 사장 COO 우츠미 슈지)이었어요. 그는 경영관리팀이었지만요"
요시다 슈헤이의 업무는 주로 여러 사업부의 이야기를 듣고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당시 제 선배가 담당하고 있던 팀이 'PS의 아버지'로 불리는 쿠타라기 씨(쿠타라기 켄)의 팀이었어요. 당시에는 닌텐도 슈퍼 패미컴에 탑재되는 사운드 칩을 만들고 있었고, 나중에 CD-ROM도 만들게 되면서 3D 그래픽이라면 (당시) 남코가 좋다고 조언해 주셨어요.
다만, 선배는 게임업계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제가 여러 가지 조언을 했습니다. 그것을 부장님이셨던 토쿠나가 씨(SCE 2대 사장 토쿠나가 테루히사)가 기억하고 계셨고, 그 후 제가 PC 사업부로 옮겨 애플과의 창구를 담당하고 있을 때 '쿠타라기 켄을 만나러 가라'라고 소개해 주셨어요"
요시다 슈헤이는 쿠타라기 켄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TV 광고 등에서 회사나 제품의 로고를 회전시킬 때 실리콘 그래픽스 워크스테이션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1대당 1000만 엔 정도였어요. 쿠타라기 씨가 '그 3D 성능을 가진 게임기를 나는 1대당 5만 엔에 팔겠다'고 말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대단하네요'라고 화답했지만, 속으로 '저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해서 토쿠나가 씨에게 보고했습니다.
실제로 쿠타라기 씨는 사내에서 ‘3대 악당’ 중 한 명으로 불리고 있었죠. '상부에 잘 접근해서 예산을 통과시키는 데 능숙하다'는 식이었어요(웃음)"
그러나 토쿠나가 씨의 반응은 요시다 씨에게는 의외였다.
"토쿠나가 씨는 '아니, 나는 쿠타라기의 말을 믿는다'라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듣고 쿠타라기 팀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죠. 그것이 1993년 초의 일입니다. PC 사업부 부장님은 아주 좋은 분이었는데, '괜찮아, 가라'며 흔쾌히 보내주셨어요. '쿠타라기 프로젝트 같은 건 어차피 금방 망할 거니까. 그렇게 되면 돌아와라'라고도 말씀해 주셨지만요(웃음).
그래서 2주 후에 도쿠나가 씨가 본사에서 이동해 와서 쿠타라기 씨의 상사가 되었고, 나중에 SCE의 2대 사장이 되었죠. 지금 돌이켜보면, 토쿠나가 씨는 자신이 게임기 사업의 책임자가 될 것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쓸 만한 인재를 모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 움직임 속에서 저를 불러주셨던 것 같아요"
최근 들어 온화한 성격이 된 쿠타라기 씨지만, 젊은 시절에는 매우 괴팍한 기운을 풍겼다고 한다.
"정말 날카로웠어요. 쿠타라기 팀은 TV 프로그램의 오프닝이나 연예인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 효과 등을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CG 시스템을 만들어서 방송국에 납품하고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플레이스테이션(PS1)을 만들고 있었어요.
쿠타라기 씨를 필두로 매우 우수한 개발자 집단이었습니다. 쿠타라기 씨는 부하 직원들을 굉장히 귀여워했고, 부하 직원들도 이 팀이라면 엄청난 것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열정을 가지고 임했습니다. 그런 아주 좋은 사제지간으로 보였어요"
1990년대 초반의 소니는 이른바 '대기업병'에 걸려 새로운 제품이 탄생하기 어려운 시기였지만, 쿠타라기 팀은 그 와중에도 항상 참신한 제품을 만들어냈다.
"소니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연구소에서 새로운 기술의 씨앗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업부로 옮겨 사업화하는 흐름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쿠타라기 씨도 원래 연구소에서 디지털 미터와 2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하는 '마비카'라는 카메라 개발에 참여했고, 그 흐름에 따라 디지털 정보 처리도 담당했죠. 그 팀이 슈퍼 패미컴에 탑재된 아주 좋은 소리를 내는 사운드 칩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실시간으로 3D CG를 움직이는 기술 연구자들을 모아 PS1의 개발팀을 만든 것이죠"
■ '모든 게임은 여기에 모인다'를 달성하고 자신의 목표를 잃다
1993년 2월, 요시다 슈헤이는 엔지니어가 아닌 첫 번째 사람으로 PS1 팀에 배치되었다.
"PS1은 1994년 말 발매를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발자들에게 게임을 개발하게 하려면 1993년 안에 개발 환경을 제공하지 않으면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역할은 팀에서 개발한 데모와 영상을 준비해 PS1의 프로토타입을 가지고 일본 퍼블리셔와 개발사들에 접근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서드파티 릴레이션십이겠네요"
하지만 3D CG에 특화된 PS1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성공할 수 없을 거라 여기는 개발자들도 많았다.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일본 전국의 퍼블리셔와 개발자에게 연락해서 약속을 잡고, 쿠타라기 씨와 사토 아키라 씨, 타카하시 유지 씨(모두 SCE 창업 멤버)와 함께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3D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소리야?'라며 의아해했죠. '3D는 게임에 쓸 수 없을 것 같아요. 애초에 움직이지 않아요', ‘스프라이트도 BG도 없나요’ 이런 식으로 말하죠.
반면, 샤프가 내놓은 X68000 등으로 3D를 하던 젊은 개발자는 '이런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꼭 하게 해주세요!'라더군요. 특히 남코는 아케이드 게임 자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쿠타라기 씨와 함께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바꾼 것은 1993년 8월에 개최된 어뮤즈먼트 머신 쇼였다. 세가가 아케이드용 3D 격투 게임 '버추어 파이터'를 출품해 큰 주목을 받은 것이다.
"‘3D CG 격투 게임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구나’, '다른 게임 장르에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흐름이 단숨에 바뀌었고, 'PS1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던 개발사에서도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다'라는 연락이 쇄도했죠.
그래서 남코의 '철권'이나 캡콤의 '스타 글래디에이터'를 필두로 많은 개발사가 다양한 3D 게임을 기획, 개발하기 시작했고, PS1에도 기대를 걸게 되었죠. 쿠타라기 씨도 개발자들이 개발하기 쉽도록 개발용 라이브러리를 충실하게 만드는 것을 상당히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1994년 12월 3일, PS1이 출시되었다.
"당시에는 생산 수량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출하할 때마다 모두 팔렸던 기억이 납니다. 남코가 '릿지 레이서'를 런칭 타이틀로 내놓았고, 1995년 3월에는 '철권'을 내놓았죠. 코나미도 '극상 파로디우스다! 디럭스 팩'을, 프롬소프트웨어에서도 고난이도 3D 액션 RPG인 '킹스 필드'를 런칭 타이틀로 내놓아 주셨고요. 사실 '100만 대를 팔면 생각해 보겠다'라고 말씀하신 퍼블리셔도 계셔서, '가자, 100만 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생각하게 되었죠"
1995년 5월, PS1은 국내 누적 출하량 100만 대를 달성했지만, 그 후 한동안 힘든 시기가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TV CM을 만들었는데, '잘 팔리니까 게임을 만들어 주세요'라는 퍼블리셔와 개발사를 향한 어필이었죠. 처음 반년은 '릿지 레이서'의 기세도 있어서 잘 나갔지만, 1995년 말에는 힘들었죠.
10월에 코나미에서 '두근두근 메모리얼 ~forever with you~'를 내놓아 주목받았지만, 라이벌인 세가 새턴에는 '버추어 파이터 2'와 아틀러스의 '진 여신전생 데빌 서머너' 등 주목받는 타이틀이 줄줄이 출시되어 큰 위협이 되고 있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1996년 2월, PS1이 다시 주목받게 된다. 스퀘어(현 스퀘어 에닉스)가 ‘파이널 판타지 7’(FF7)을 PS1용으로 발매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당시에는 스퀘어와 에닉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와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가 국내 컨슈머 게임의 톱 IP였기 때문에, 그 최신 넘버링 타이틀이 PS1과 세가 새턴이 등장한 세대에서 어디로 갈지 주목받고 있었습니다.
사카구치 씨(FF 시리즈의 창시자 사카구치 히로노부)가 구현하고자 했던 세계관이나 CG를 사용한 할리우드 영화 같은 RPG를 만들기에는 닌텐도 64의 ROM 카트리지 용량으로는 어려워 제 상사였던 다카하시 유지 씨가 열심히 스퀘어에 영업을 했어요. 그 결과 FF를 비롯해 '사가 프론티어', '토발 No.1'도 PS1으로 나오게 됐습니다. 1995년은 힘들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좋은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죠."
FF7 발표 이후, 각 퍼블리셔에서 PS1을 위한 주목할 만한 타이틀이 속속 발표, 발매되었다.
"1996년은 3월에 캡콤이 ‘바이오 하자드'를 내놓았고, SCE에서도 '포포로크로이스 이야기’, ‘아크 더 래드 2’, ‘파라파 더 래퍼’, 그리고 제가 담당한 ‘크래쉬 밴디쿳’ 등이 쏟아져 나온 해였어요. 스퀘어의 진입을 계기로 대형 퍼블리셔들이 동승하는 형태가 되면서 '이건 PS1이 팔릴 것 같다'며 에닉스도 '드래곤 퀘스트'를 내기로 결정해 주셨고요.
저는 그때까지 PS1의 첫 캐치프레이즈인 '모든 게임은 여기에 모인다'를 목표로 업무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표가 사라져 버렸어요"
■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선 기술 교류에 감명하여 미국이 게임업계의 선두에 서게 될 것을 예감
대형 퍼블리셔들의 참여가 결정되고 목표를 달성한 요시다 슈헤이가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1996년 2~3월경이었다고 한다.
"마침 FF7이 발표된 직후에 '크래쉬 밴디쿳'의 판권을 얻었으니 프로듀서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어요. 또한, 프로듀서라고 해도 한 타이틀의 현지화만 담당하기 때문에 SCE 내부 제작도 담당해 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도 받았어요.
당시 내부 제작은 ‘모터툰 그랑프리’ 시리즈를 만들던 야마우치 씨(현 폴리포니 디지털 대표 야마우치 카즈노리)의 팀과 CG팀 밖에 없었죠. 야마우치 씨 팀을 지원하면서 사람을 고용해 ‘삐뽀사루 겟츄'와 '레전드 오브 드라군’, 그리고 ‘이코’ 팀을 만들어 총 4개 팀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삐뽀사루 겟츄' 팀은 전 세가 AM2 연구소의 타카츠카 스스무, ‘레전드 오브 드라군’ 팀은 전 스퀘어의 하세베 야스유키, 그리고 ‘이코’ 팀은 전 워프의 우에다 후미토가 중심이 되어 기획과 개발을 진행하였다.
"타카츠카 군은 세가에서 '파이팅 바이퍼즈'의 애니메이터로 일하면서 신입사원 2명과 함께 3D 액션 게임을 만들고 있었어요. 제가 담당하게 되었을 때 ‘이거 좋다'고 생각해서 인원을 늘려 '삐뽀사루 겟츄’ 팀으로 만들었어요.
하세베 군은 스퀘어에서 슈퍼 패미컴용 '슈퍼 마리오 RPG'의 배틀 디자이너를 하고 있었는데, 다음에는 판타지 RPG를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개발 중인 작품이 FF7의 리얼타임에 가까운 전투와 프리렌더링의 아름다운 배경에 감탄했고, 제 부서에는 CG팀도 있었기 때문에 FF7과 같은 RPG를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그 CG팀에 워프에서 온 우에다 군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런 게임을 만들고 싶다'며 자작 단편영화를 들고 왔어요. 그것은 소년이 소녀의 손을 잡고 성에서 도망치는 영상이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코'의 콘셉트 무비가 되었습니다"
이후 1999년에 '삐뽀사루 겟츄'와 '레전드 오브 드라군'이 출시되었다. 그러나 '이코'의 개발은 난항을 겪었다.
"PS1에서는 프레임 레이트가 (초당) 15 정도밖에 나오지 않아서 이것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PS2로 바꿨어요.
그런데 바로 그 직후에 제가 미국으로 가게 됐습니다. 2000년 3월에 PS2가 나왔기 때문에 2000년 초까지 PS2용 타이틀을 준비했죠. 플랫폼 전환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PS1 타이틀을 다 만들고 나서 PS2 타이틀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삐뽀사루 겟츄’ 팀을 몇 개로 나눠서 '작아도 좋으니 PS2 출시에 맞춰서 게임을 만들어 달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게 바로 '판타비젼'으로, 제가 마지막으로 프로듀싱한 타이틀이었죠"
요시다 슈헤이가 미국으로 간 것은 당시 SCE 아메리카의 수장이었던 히라이 가즈오의 제안을 받고서였다.
"히라이 씨와는 ‘그란투리스모’, ‘크래쉬 밴디쿳’ 등을 통해 업무적으로 교류가 있었어요. '삐뽀사루 겟츄'나 '레전드 오브 드라군'도 봐주셨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미국에서는 4개의 스튜디오를 하나로 묶는 게임 제작 총괄을 맡았어요"
미국에서는 일본과 달리 스포츠 게임을 중시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미식축구라면 EA의 ‘매든 NFL’ 시리즈가 지금도 유명하지만, 당시 SCE 아메리카도 989 Sports라는 브랜드로 ‘NFL GameDay’ 시리즈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어요. 다만 SCE 아메리카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PS2로 전환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죠.
반면 EA는 PC 버전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기술이 발전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SCE 아메리카 팀은 계속 PS1 기술로 만들었기 때문에 단기간에 PS2로 넘어가려고 해도 잘 안 됐어요. 그래도 메이저리그를 다룬 ‘MLB’ 시리즈 팀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남을 수 있었죠.
결국 스포츠 게임에서 NFL은 ‘매든’, 축구는 ‘FIFA’, 농구는 ‘2K’, 메이저리그는 'MLB'처럼 한 회사 브랜드만 살아남았어요. 이는 스포츠 게임이 방대한 데이터 축적을 바탕으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히트한 타이틀에 플레이어가 흡수되어 버리는 거죠. 그런 미국만의 시장성이 있었어요"
또한, 요시다 슈헤이는 세계 각국의 게임 개발자들이 모이는 컨퍼런스인 GDC(Game Developers Conference)에서 기술이나 노하우가 공유되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이 게임은 이런 기술을 사용했다는 것을 서로 발표하는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에서는 자사 기술은 자사만의 기술이고, 인재의 이동도 거의 없어 중도 채용이 어렵습니다. 그렇게 미국 게임들이 2~3년 사이에 점점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일본 게임을 보지 않게 되었어요. 참고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만드는 게임이 더 자극적이었고, 자사에서도 ‘갓 오브 워’ 등은 대단하다는 평을 들었으니까요"
요시다 슈헤이는 언젠가 미국 게임이 업계 선두를 차지할 것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이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기술력이 낮을 때는 캐릭터 등을 데포르메로 표현할 수밖에 없죠. 그렇게 되면 문화의 차이는 크게 상관없고, 일본 팀이 잘하는 게임성이나 게임 플레이의 느낌으로 승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 게임이 세계를 석권할 수 있었죠.
하지만 기술력이 향상되고 표현력이 점점 높아지면서 문화마다 캐릭터 디자인이나 스토리 등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죠. 영국에서 '그랜드 세프트 오토'가 나왔고, PS2에서도 대히트를 쳤죠. 일본의 애니메이션풍 캐릭터도 나쁘지 않고 게임도 재미있지만, 미국에서는 역시 '갓 오브 워'의 아저씨 주인공이 더 멋있어요. 일본에서는 반대로 ‘뭐야, 이 대머리 아저씨는?’ 같은 느낌인데, 표현력이 높아지면서 시장성이 나뉘게 된 거죠"
또한, 당시 서양 게임은 조잡하다는 이미지도 있었지만, '갓 오브 워'는 세심하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었다.
"일본 게임을 많이 연구한 것 같아요. 매우 정교하고 플레이하기 쉬운 게임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니까요. 아마 ‘갓 오브 워’ 팀에 일본인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GDC 등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협력하며 만들어 나갔던 것 같아요.
예산도 할리우드 영화 수준으로 책정되고, 인력의 유동성이 있는 것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인력에 관해서는 이동해도 문제가 없도록 문서가 잘 정리되어 있고, 새로운 사람이 바로 업무에 투입될 수 있는 환경과 툴이 만들어져 있었어요"
그런 미국에서의 게임 제작에 대해 요시다 슈헤이는 흥분했다고 말한다.
"PS3 사양에 대해 전 세계 개발자들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하는데, 유럽과 미국은 비교적 빨리 (벽을)극복할 수 있었어요.
예를 들어 너티독의 '언차티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저는 퍼스트 파티 책임자였기 때문에 마크 서니의 서니게임즈와 너티독이 공동 개발한 게임 엔진 ‘ICE’(Initiative for a Common Engine)를 서드 파티에도 제공했죠. '라쳇 앤 클랭크' 시리즈로 유명한 인섬니악 게임즈 같은 훌륭한 분들도 참여해서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죠. 다른 자체 스튜디오에서는 '왜 굳이 너티독의 엔진을 써야 하느냐'라는 반발도 있었지만, 열심히 설득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2006년 11월로 예정된 PS3 출시를 준비하던 중 쿠타라기 씨의 발상으로 2005년 9월에 SCE 월드와이드 스튜디오(당시)가 설립된다. 초대 사장은 유럽 팀의 개발 책임자였던 필 해리슨이 맡았다.
"그전까지는 3개 지역에 각각 회사가 있었고, 각자가 알아서 게임을 만들었죠. 중간 규모의 퍼블리셔가 3개가 있어도 앞으로 규모가 커지는 게임 개발에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각자 마음대로 하다 보니 비슷한 게임을 만드는 등 다른 지역과 경쟁해서 팔리지 않는 상황도 생겼죠. 그래서, 미국에서 만든 게임을 일본에서는 캡콤에서 출시하는 등 매우 비효율적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중단하고 월드와이드 스튜디오라는 하나의 우산 아래 퍼스트 파티의 개발을 통합하고, 엔진 공유와 기술 정보 교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요시다 슈헤이는 SCE 월드와이드 스튜디오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월드와이드 스튜디오로서 하나의 그룹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스튜디오에서 개발 중인 타이틀을 보고 포트폴리오 계획을 세우며, 글로벌 매출이 이 정도이니 개발 예산은 이 정도 배분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는 등 가장 실적이 좋을 것 같은 스튜디오에 투자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저 자신은 각 지역에서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해 키울 수 있는 예산 배분을 했던 거죠. 물론 지역마다 게임에 대한 요구사항이 달라서 그런 희망 사항도 최대한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 균형을 맞추면서 진행했습니다"
■ 일본으로 돌아와 인디 게임의 전도사로서 활동을 시작하다
한편 요시다 슈헤이는 인디 게임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그 계기는 PS 스토어의 오픈에 있었다.
"월드와이드 스튜디오에서는 인디 게임도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PS3의 발매와 동시에 PS 네트워크가 시작되고 PS 스토어가 오픈했기 때문이죠. PS 스토어는 유저가 찾아와야만 성립되는데, 당시에는 디스크 기반 게임의 다운로드 판매는 고려되지 않았어요.
판매점에 이득이 없고, 데이터 용량도 큰데다가 하드디스크 용량도 적었기 때문에 현실적이지 않았죠. 그래서 다운로드 판매가 가능한 작은 규모의 오리지널 게임을 퍼스트 파티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러한 소규모 게임 개발은 PS1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고 한다.
"디스크 기반으로 60달러의 풀 프라이스, 어느 정도 시장성을 읽을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제약이 없어지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틈새시장이지만 날카롭고, 10달러 정도면 팔릴 수 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젊은 사람들의 새로운 아이디어에 투자할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어요"
그런 활동 중 산타모니카 스튜디오의 프로듀싱으로 2010년에 출시한 것이 댓게임컴퍼니(thatgamecompany)의 '저니'였다.
"그런 명작이라 불리는 타이틀도 낼 수 있어서 저 자신도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동시에 2000년대 후반부터 유럽과 미국에서는 디지털 배급을 통한 인디 게임 붐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브레이드'와 같은 히트작이 많이 나왔고, 저도 E3 같은 행사에서는 항상 인디 게임을 체크하고 있었어요. 마음에 드는 게임이 있으면 그 게임을 만든 개발자와 함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도 하고요. 그렇게 퍼스트 파티로서 소규모 게임을 만들면서 다른 인디 게임을 응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인디 게임의 붐이 커지면서 월드와이드 스튜디오의 소규모 게임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훌륭한 인디 게임은 가만히 놔둬도 PS 스토어에서 팔리게 되었죠. 하지만, 퍼스트 파티에서 소규모 게임을 만들어도 멀티 플랫폼으로 만들 수 없고, 경쟁도 어렵기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퍼스트 파티는 기본적으로 디스크로 출시하는 중대형 게임 개발이 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인디 게임을 계속 쫓아다니던 요시다 슈헤이는 2008년 일본으로 돌아와서 인디게임이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이렇게 훌륭한 인디 게임이 전 세계에 나와 있는데, 일본어로 현지화되지 않은, 때에 따라서는 일본에서 출시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미디어는 대형 퍼블리셔의 홍보 부서가 장악해서 소개할 기회가 없고, PC 게임도 일본에서는 아직 마이너한 존재였기 때문에 PC용 인디 게임이 해외에서 히트를 쳐도 국내에서는 플레이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 점은 놀라웠죠"
그런 가운데 2012년부터 '일본 최대 규모의 인디 게임 축제'인 비트서밋(BitSummit)이 매년 교토에서 개최되기 시작했다.
"플레이스테이션도 스폰서였기 때문에 저도 매년 가서 인디게임의 전도사 같은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퍼스트 파티의 책임자로서 업무를 수행하면서 마케팅 담당인 키타오군(현 프롬소프트웨어 키타오 야스히로)과 함께 'J스타와 놀자'라는 프로그램을 니코니코 생방송으로 진행하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키타오군이 편의점에서 니코니코 생방송 티켓을 사와 회사 창고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카메라 앞에서 생방송을 했기 때문에 화질이 굉장히 안 좋았어요(웃음). 내용도 사전에 거의 정해져 있지 않고, 키타오군이 ‘오늘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며칠 몇 시에 오세요'라는 메일이 날아올 뿐이었어요. 원래는 퍼스트 파티 게임을 홍보하는 프로그램인데도 불구하고, 제가 추천하는 인디 게임 코너를 따로 만들어서 매번 제가 추천하는 타이틀을 소개했죠.
'다운웰'이 출시됐을 때는 개발자인 Moppin 군을 게스트로 섭외한 적도 있어요. 중간에 니코니코 생방송 운영자가 '이건 PS의 공식 프로그램이다'라고 알아봐 주셔서 갑자기 순위가 올라가고 화질도 좋아졌지만, 그래도 계속 수작업으로 진행했죠"
■ SIE에 인디 게임 이니셔티브를 정착시키겠다는 목표를 달성
이러한 활동으로 PS 팬들에게 '인디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는 2019년 월드와이드 스튜디오 사장직을 사임하고 인디 이니셔티브 대표로 취임했다. 이후에도 인디 게임의 전도사로서 활동을 계속하게 되었다.
"1996년부터 2019년까지 퍼스트 파티에서 일하면서 보람도 있었고, 훌륭한 팀과 함께 매년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지만, 역시 기간으로 치면 너무 길었어요.
그래서 당시 CEO였던 짐 라이언이 '퍼스트파티 책임자에서 내려와 인디게임을 어떻게든 해봐라'라고 했어요. 그때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당시 'PS가 인디 게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기 때문에 사내외에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사내 인디 게임 담당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는 초창기부터 PS에 몸담아 온 요시다 슈헤이 자신의 자부심이 있었다고 한다.
"PS에는 원래 크리에이터들을 소중히 여기고 '파라파 더 래퍼'와 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활성화해 온 DNA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큰 회사가 되었지만,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도 'PS는 이런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는 중요한 토양인 인디 게임을 큰 플랫폼인 PS가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고,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인디 게임을 담당하면서 새로운 부서를 만드는 것은 굳이 피했다고 한다.
"짐과 상의해서 조직은 만들지 말자고 했어요. 조직 간의 협상 같은 건 귀찮기도 하고, 제가 회사를 떠나도 괜찮을 상황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죠. 기존 부서 담당자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활성화하고, 그분들을 통해 제 목표를 달성하고 훌쩍 사라지는 것을 생각했죠"
하지만 당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으로 그의 계획은 좀처럼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처음 2년은 힘들었죠. 인디 게임은 실제 이벤트에 참가해서 직접 보고 만져보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이 불가능해졌으니까요. 그래도 내부적으로 조정을 하면서 온라인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갔고, 3년 차부터는 오프라인 행사가 부활하면서 전 세계 인디게임 행사에 나가게 되었어요. 동시에 인디 게임 업계 사람들로부터 ‘툴이 불편하다’, 'PS 스토어에서 인디 게임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여러 부분을 개선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PS 스토어의 인디 게임 판매는 이전과 달리 호조를 보이고 있다.
"5년 전만 해도 인디게임의 스위치 버전이 PS 버전보다 3~5배 정도 더 많이 팔린다고 했어요. 그런데 2024년에는 그 차이가 줄어들고, 오히려 타이틀에 따라서는 PS 버전이 더 많이 팔렸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제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초기부터 PS에 관여해 온 사람들 - 쿠타라기 씨, 히라이 씨, 앤드류 하우스, 짐 라이언이 이미 떠나고 저 한 명만 남아있는 상태였으니까요.
이제 PS는 니시노 씨(현 SIE 대표이사 니시노 히데아키)와 헤르멘(현 SIE 스튜디오 비즈니스 그룹 CEO / PlayStation Studios 총괄 책임자 헤르멘 허스트)에 의해 새로운 세대의 PS가 되어 버렸어요. 니시노 씨는 아직 40대입니다. 그런 새로운 세대의 경영진 아래에서 인디 게임 이니셔티브도 상당히 정착됐고, 해야 할 일도 사내 로드맵에 따라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2025년 1월에 SIE를 퇴사한 요시다 슈헤이는 인디 이니셔티브 대표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인디게임에 관여한 기간에는 크리에이터와 직접 작업하여 히트작이 탄생하거나 게임 어워드에서 상을 받았을 때 기뻐하는 것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퍼블리셔도 개발자도 개발 중인 게임을 보여주시곤 했어요. 그것들을 제 SNS 채널에서 '다음에 PS용으로 이런 게임이 나온다'라고 소개하면, 유저분들이 '소개받은 게임을 해봤는데 재미있었다'라는 피드백을 보내주시는 거죠. 그런 교류도 즐거웠어요"
PS를 떠난 현재도 그는 인디 게임에 계속 관여하고 있다.
"인디 이니셔티브 대표를 맡고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제가 존경하는 인디 퍼블리셔나 인디 개발자를 지원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연락을 주셔서 회사를 그만둔 후 더 바빠질 정도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퍼블리셔의 입장에서 많은 게임들의 내용을 체크하고, 개발 중인 게임의 마일스톤을 보고 피드백을 주는 등 제가 20년 넘게 해온, 저도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일하면 되니,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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